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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개마무사

인포레이터 2011. 9. 15. 16:30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바로 현재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아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 인근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고구려 인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에도 있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추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말조차 강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소유하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이유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세계 최초의 개마무사


험한 산악지대가 많은 지리 조건 때문에 고구려는 필연적으로 내구력과 기동력이 유리한 기마병을 군 편성에서 가장 중요시했다. 그리고 기마병을 철기로 무장시키려면 먼저 철기를 생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강철 무기가 발달한 것은 고구려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데다가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은 뒤에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고구려 개마는 크게 세 부분, 즉 말의 머리에 씌우는 말투구, 말갑옷, 말장구로 나뉜다. 말투구는 말머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 모양으로 오려서 둥그렇게 감싸 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 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쇠투구와 쇠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에게까지 쇠갑옷을 입힌 고구려의 중무장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전에서는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적의 활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3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에서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개마 모형이 나왔고 3세기 중엽에는 고구려군 기병의 절반을 '철기'가 차지했다는 사실은 개마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고국원왕의 무덤이나 덕흥리 벽화무덤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행렬도에 왕과 귀족의 수레 제일 근처에 개마무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이는 전투시나 행군시 개마무사들이 항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개마는 13세기에야 나타난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다량의 개마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개마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제력과 말갑옷과 같은 우수한 장비의 대량 생산이 고구려의 국방력을 급속히 강화하여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에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다. 이 당시의 정복 전쟁에서 개마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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